마르크 샤갈(Marc Chagall, 1887–1985)은 러시아 태생의 프랑스 화가로, 20세기 모더니즘 회화에서 독보적인 언어를 구축한 예술가입니다. 그의 그림은 꿈과 현실, 종교와 민족, 사랑과 상실이 혼재하는 세계이며, 그 중심에는 언제나 푸른빛의 감성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샤갈의 파란색은 단순한 색채가 아니라, 유대인의 역사와 문화, 정체성을 응축한 감정적 상징입니다.
1. 파란색은 어디서 오는가 – 정체성과 추억의 색
샤갈은 러시아의 작은 유대인 마을(셰틀)인 비텝스크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종교적 삶과 공동체 문화 속에서 자랐습니다. 그의 회화에 자주 등장하는 공중에 떠 있는 연인, 염소, 바이올린 연주자, 회당, 시계 등의 상징들은 이 유년기의 세계를 시적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이런 장면들 속에 깊이 스며든 파란색은 노스탤지어와 고요, 영혼과 꿈을 상징합니다. 샤갈에게 파란색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삶의 기억을 감싸는 정서적 매개체로 작용합니다. 특히 유대인 디아스포라의 정체성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파란빛 안에서 가시적 감정으로 재현됩니다.
그는 파란색을 통해 유대인의 정체성과 상처를 은유적으로 담아냈으며, 이 감정은 세계 어느 민족에게나 통하는 상실과 연대의 보편성을 지녔습니다.
2. 색채로 표현한 영혼 – 유대교적 상징과 초현실적 시선
샤갈은 유대교적 상징을 회화적 언어로 승화시켰습니다. 천사, 양, 샤파르(양각 나팔), 율법서 등은 직접적으로 등장하거나 은유적으로 암시됩니다. 그러나 그는 정통적 재현이 아닌, 꿈과 환상, 떠오르는 기억처럼 흐릿하고 유동적인 형상으로 묘사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파란색은 영적 매개로 작용합니다. 샤갈의 파란 하늘과 그림자, 의복, 인물의 윤곽은 마치 인간과 신성의 경계를 허무는 통로처럼 화면을 감쌉니다. 특히 ‘푸른 연인들(The Blue Lovers)’, ‘푸른 바이올린 연주자’ 같은 작품은 색의 농담과 번짐을 통해 감정을 직접적으로 전달합니다.
그에게 파란색은 종교적 영감뿐 아니라, 포기할 수 없는 인간성과 정체성을 상징했습니다. 유대인이란 무엇인가, 유대인이 겪은 고난은 어떻게 기억되고 승화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그의 대답은 언어가 아닌 색으로 말해진 시였습니다.
3. 상실과 희망 사이의 예술 – 유대인의 역사와 현대 회화의 연결
샤갈은 제1차,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유럽의 유대인이 겪은 비극의 세기를 온몸으로 체험했습니다. 그는 프랑스로 이주했지만, 나치의 유대인 박해로 인해 미국으로 망명해야 했고, 고향과 가족의 상실은 평생 그의 예술에 그림자를 드리웠습니다.
그러나 그는 비탄에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고통을 초월한 희망의 언어로서 예술을 선택했습니다. 샤갈의 파란색은 단지 눈물의 색이 아니라, 신뢰와 연결, 영혼의 빛을 상징합니다. 스테인드글라스 작품 ‘예루살렘 창문’이나 ‘랭스 대성당의 창’에서도 이 파란색은 빛을 타고 하늘과 인간을 이어주는 통로로 작동합니다.
샤갈은 유대인이라는 뿌리를 끝까지 잃지 않았고, 그 뿌리를 파란색이라는 상징적 공간에 심었습니다. 이는 회화가 단지 미적 장르가 아니라, 정체성과 기억, 종교와 문화를 연결하는 시각적 언어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결국, 샤갈의 파란색은 단순한 미술 기법이 아니라 유대인의 역사, 상실, 꿈, 회복을 안고 있는 시각적 기도였습니다. 그의 그림을 바라볼 때 우리는 파란색을 통해 한 민족의 눈물과 영혼, 그리고 끊어지지 않는 희망을 함께 마주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