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야는 왜 공포를 화폭에 담았나?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는 18~19세기 스페인을 대표하는 화가이자, 유럽 미술사에서 가장 급진적인 시선을 가진 예술가 중 한 명입니다. 그는 왕실의 궁정화가로 시작했지만, 말년에는 공포, 절망, 폭력, 광기가 가득한 그림을 남겼습니다. ‘사투르누스가 아들을 삼키다’, ‘1808년 5월 3일’, ‘검은 그림들’ 등 그의 후기작들은 오늘날에도 충격적인 이미지로 회자됩니다. 그렇다면 고야는 왜 이런 ‘공포’를 화폭에 담았던 걸까요?

어두운 방에서 공포에 질린 괴물을 그리는 프란시스코 고야를 묘사한 사실적이고 상징적인 회화

1. 개인의 병과 광기 – 예술의 내면화

고야는 1790년대 후반에 심각한 병을 앓으며 청력을 잃게 됩니다. 이 사건은 그의 삶과 예술에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고, 그는 외부 세계가 아닌 내면의 세계에 집중하게 됩니다. 청각 장애는 고립을 불러왔고, 그 고독 속에서 그는 자신의 불안과 공포, 환각과 광기를 그림으로 토해냈습니다.

이후의 고야 작품은 점점 어두워지고, 초자연적이고 불안한 존재들이 등장합니다. 이는 단순한 상상이 아니라, 정신적 불안과 심리적 고통을 시각화한 결과였습니다. 그는 말년에 집 벽에 직접 그린 ‘검은 그림들(Pinturas Negras)’ 시리즈를 통해, 인류의 광기와 절망을 절규하듯 표현했습니다.

예술은 고야에게 있어 치료이자 고백이었습니다. 그는 시대의 어둠을 그린 것이 아니라, 자신의 어둠을 시대에 던진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고야의 그림은 공포를 소비하게 하기보다, 공포를 경험하게 만드는 예술이었습니다.

2. 역사와 폭력 – 현실의 잔혹한 기록

1808년 스페인 마드리드에서는 프랑스 나폴레옹 군대의 침입에 맞선 민중 봉기가 발생했고, 수많은 시민이 학살당했습니다. 고야는 이 사건을 목격하고 ‘1808년 5월 3일’이라는 걸작을 통해 이를 기록합니다. 그는 권력의 잔혹함과 개인의 희생을 정면으로 응시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작품은 단순한 역사화가 아닙니다. 화려한 제복도 없고, 영웅적 연출도 없습니다. 총을 든 프랑스 병사들의 얼굴은 보이지 않고, 총구 앞에 선 민중들의 공포와 절망, 체념의 표정만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이는 예술이 권력에 대한 고발이자 피해자의 기억을 보존하는 수단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입니다.

고야는 전쟁을 미화하지 않았고, 민중을 낭만화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사실 그 자체의 잔혹함을 묘사했고, 관람자가 눈을 돌리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작품은 오늘날에도 반전 예술의 상징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3. 신화의 해체와 인간 본성 – 사투르누스의 공포

고야의 후기작 중 가장 충격적인 것은 단연 ‘사투르누스가 아들을 삼키다’입니다. 고전 신화를 바탕으로 한 이 그림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자식을 삼키는 아버지의 비극을 광기 어린 얼굴과 피범벅의 묘사로 그려냅니다.

이 작품은 단지 신화를 재현한 것이 아니라, 권력, 본능, 인간의 잔혹성을 상징적으로 드러냅니다. 사투르누스의 모습은 신이 아니라 괴물과 같은 인간으로 보이며, 이는 고야가 인간 본성 자체에 의문을 던진 결과입니다.

이러한 묘사는 오늘날의 심리학적 해석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고야는 초자연적 공포를 인간 내부의 욕망과 두려움으로 전환했고, 그 표현 방식은 현대 공포예술과 정신분석적 예술의 시초로 간주됩니다.

결국 고야가 공포를 그렸던 이유는 단순한 충격이 아니라, 그 공포 속에 감춰진 인간의 본성과 사회의 모순을 폭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는 아름다움 대신 진실을, 희망 대신 현실을 택했고, 그로 인해 ‘최초의 현대 화가’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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